반도체 부문에서 부진을 거듭하며 최근 삼성전자 위기설이 많이 나오고 있죠. 그럼에도 삼성은 우리나라 국민들 마음 속 영원한 No.1 기업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삼성 그룹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창업주부터 이건희 회장, 현재 이재용 회장에 이르기까지 삼성 그룹의 역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 해당 내용은 유튜브 '세상의 모든 지식' 채널을 참고했습니다.
1. 이병철 회장, 삼성의 씨앗을 뿌리다
호암 이병철의 유년 시절
삼성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훗날 대한민국 경영계에 큰 획을 그은 호암 이병철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의 부유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특히 논어를 즐겨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12살에는 고향을 떠나 진주와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신식 학교를 다녔고, 잠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기도 했지만 지병으로 중퇴했습니다. 그는 평생 졸업 증서가 한 장도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도박을 끊고 사업에 눈뜨다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이병철 회장은 한때 친구들과 골패라는 도박에 빠져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934년 어느 날, 잠든 세 자녀의 모습을 보고 깊은 깨달음을 얻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300석의 쌀을 추수할 수 있는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받아, 부산, 대구, 경성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사업 아이템을 열심히 찾았다고 합니다.
삼성상회와 초기 성공
이병철 회장은 1936년 친구들과 함께 마산에 협동 정미소를 세우며 도정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트럭 10대를 보유한 일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여 운수업도 함께 하며 첫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중일 전쟁으로 잠시 파산을 겪기도 했지만,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청과물과 건어물을 무역하는 삼성상회를 설립하며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별표국수'를 만드는 제조업도 겸했고, 훗날 '월계관' 청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조선양조'도 인수하여 운영했습니다.
2. 사업 확장과 위기 속 성장
국제 무역으로 도약하다
광복 이후 이병철 회장은 조선양조의 성공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당시 국내 경제가 암울했지만, 그는 국제 무역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1948년 11월, 서울 종로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며 마카오와 홍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국제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기를 맞았고, 다행히 조선양조에 비축된 자금 덕분에 1951년 1월 10일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롭게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제조업의 기틀을 마련하다
한국전쟁 중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이병철 회장은 소비재를 수입에 의존하기보다 국내에서 직접 제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53년 11월 5일, 국내에 설탕 제조 공장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제일제당을 설립했습니다. 제일제당의 설탕은 수입품의 3분의 1 가격으로 출시되었고, 초기에는 국산품에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곧 큰 인기를 얻으며 설탕 수입 의존도를 1953년 100%에서 1956년 7%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의식주'의 '의'를 책임지다
제일제당의 성공에 힘입어 이병철 회장은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 중 '의'에 해당하는 섬유 산업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국내 섬유 산업은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는데, 그는 일반인들도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짓고 직원들을 해외에 보내 기술을 배우게 했으며, '골덴텍스'라는 뛰어난 품질의 원단을 생산하며 국내 모직 시장을 선도했습니다. 이 성공으로 이병철 회장은 '재벌'이라는 호칭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3. 위기 속 도전, 전자산업의 시작
사카린 밀수 사건과 언론 진출
1960년대 초, 이병철 회장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며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고 추징금을 부과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때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1966년에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져 둘째 아들 이창희가 구속되고 자신은 재계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병철 회장은 언론의 중요성을 깨닫고 1964년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방송(TBC)을 개국했으며, 1965년에는 중앙일보를 창간하며 언론 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전자 사업 진출의 결단
재계 은퇴 선언 후에도 이병철 회장은 일본을 자주 오가며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전자 산업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전자 산업은 금성사(현 LG전자)가 이끌고 있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사돈 관계였던 금성사 구인회 회장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반도체, 미래를 보다
삼성전자는 초기 일본 산요전기와의 합작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국내 기존 전자 업체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모든 생산품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사업 허가를 받았고, 1973년 4월 첫 자체 제작 제품인 흑백 TV '마하 506'을 출시했습니다. 특히 5초 만에 켜지는 '이코노 TV'는 1978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삼성전자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83년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며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4.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시대와 재용 부회장의 승계
이건희 회장의 등장과 D램의 성공
이병철 회장의 삼남인 이건희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유학을 통해 깊이 사고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미디어 계열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형제간의 후계자 경쟁에서 결국 삼성그룹 2대 회장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4년 개인 자산으로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12월 1일, 삼성전자는 개발 시작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스택 공법'이라는 독자적인 개발 방식을 선택하며 4M D램 등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서 선두 업체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혔습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신경영 선언
1987년 이병철 회장의 사망 후 이건희는 46세의 나이로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8년 '제2창업 선언'을 통해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고, 삼성전자 중심의 사업 구조 재편을 추진했습니다. 1993년, 그는 미국 출장 중 삼성 TV가 매장 구석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불량 세탁기 생산 영상까지 접한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했습니다. 이 선언은 품질 혁신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였고, 1995년에는 불량 휴대폰 15만 대를 불태우는 **'애니콜 화형식'**을 거행하며 그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시대와 미래
1997년 대한민국을 덮친 IMF 외환 위기 속에서 삼성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삼성전자 중심의 제조업과 삼성생명 중심의 금융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재용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유학을 떠났고, 2000년대 초에는 e삼성이라는 인터넷 사업에 도전했지만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상장 주식 매입과 전환사채 인수를 통해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이는 삼성물산과의 합병을 통해 삼성전자 경영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 관련 뇌물 혐의 등으로 재판이 진행 중이며, 2020년 대국민 사과를 통해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삼성의 역사는 도전과 혁신, 그리고 위기 극복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의 삼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